불편한 영화, '밀양'

오아시스의 기억

나는 일단 영화를 보러 극장에 들어가면, 아무리 영화가 형편없어도 잠을 자거나
중간에 나오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기 보통들 그럴 것 같다.) 실수로 정말 쓰레기
내지 시간낭비라고 생각되는 영화를 골랐다고 할지라도 상영시간이 끝날 때까지는
(비웃어가며) 봐 주는 편이다.

그런 내가 상영중에 나와버렸던 영화가 딱 하나 있었다. 그게 바로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였다. 물론 오아시스가 형편없는 영화라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운 이유로 나는 그 영화를 끝까지 볼 수가 없었다.

너무나 리얼하게 그려진 장애를 가진 이들의 삶을 보기에 앞서서 나는 절대로 영화
에 그려진 장애인들을 동정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었다. 동정은 동정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동정의 대상이라는 것을 깨닫고 또 한번 절망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 - 신영복 선생님의 책에 나온 말이다 - 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마음먹고 영화를
관람했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엄청난 불편함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영화의 중간
에 이르렀을 때, 나는 불편함의 근원이 내가 그들을 동정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을 보며 안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다.

어느새 난 스크린에 그려진 그네들의 힘겨운 삶을 보며, 비열하게도 내가 그들과
같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시점부터는 바늘방석에
앉은 것같아 더 이상 영화를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창동의 명작 '오아시스'는,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중간에
나와버린 영화가 되었다.



불편함

오아시스 이후 처음으로 전직 문화부 장관의 영화를 보러 간 나는 실로 오랜만에
그 때의 그 불편함을 느껴야 했다. '2시간 반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라고
내게 이 영화를 추천한 이가 말했지만, 나는 그 2시간 반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몇 번이나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정도다.

그 불편함은 어디서 나왔을까...?

그것은 아마도 Reality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인간이 겪게 되는 고통,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거나 혹은 잊어버리고자 하는 몸부림.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현실.
너무나 담담하게, 그리고 너무나 직설적으로 그려진 그 장면들을 보는 것은 내겐
참으로 고통스러운 '노동'이었다. 감독에게 임금을 요구하고 싶을 정도로...

다행이 내가 아직 미혼이고, 아이가 없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내게 아이가 있었다면
또 한번 나는 극장을 뛰쳐나왔을 지도 모른다. 내 아이가 저렇게 되지 않았음에
안도하는 스스로의 비열함을 또 한 번 발견하고...

정말로 커다란 고통은 그 고통을 제 3자의 입장에서 지켜보는 이에게도 상당한
고통을 강요한다. 하물며 그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당사자에게는 어떨까?

아마도 죽거나... 혹은 미치거나...



종교 = 아편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일찌기 공산주의자들은 종교가 인민들이 자신이 처한 (착취당하는) 현실을 망각
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종교의 해악을 지적했다. 이 이야기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떤 면에서 이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이 영화속의 이신애는 자신에게 닥친 엄청난 불행과 그 불행이 가지고 온 엄청난
고통속에서 일종의 피난처로서 '종교'를 찾게 된다. 그리고 한동안이나마 그 종교
로부터 얻은 '마음의 평화'로 인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듯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영화의 그 부분을 보며 내내 불편했다.

이신애는 과연 종교를 통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한 것일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저런 이유를 댈 것 없이, 한 순간 그녀가 얻었던
평화가 그토록 형편없이 무너져 버린 것이 그 '마음의 평화'가 진정한 해결이
아니었음을 반증한다.

그렇다면 그 '마음의 평화'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이 마치 진통제와 같은 무엇이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한다. 진통제가 환자
의 고통을 완화시킬 뿐 근본적으로 병을 치료하지 못하는 것처럼, 종교는 그녀에게
자신이 처한 참담한 고통을 잠시 잊게 했을 뿐 그녀를 구원한 것은 아니었다.

종교를 통한 평화라는 것이 많은 경우 그렇다.

종교는 개인의 삶에 질곡으로 다가오는 현실적인 문제들 - 그것이 금전적인 것이든
인간관계에 의한 것이든, 이신애의 그것처럼 아주 특수한 무엇이든 - 을 정면으로
대치하고 문제를 풀어나가기 보다는 '신의 섭리'로 간주하고 '초월'하고자 하는
자세를 견지한다.

나는 이것이 많은 부분 아편 - 혹은 진통제 - 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상처를
치유하기보다 그 상처를 잊도록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게 꼭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만약 치료가 불가능한 상처라면 고통이라도 덜어내고자 하는 것은 병원
에서 진짜 환자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로 사용하는 해법이니까.

하지만 한편으로 이처럼 고통만을 덜어내는 처치법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고, 그
불안정함이 내내 나를 불편하게 했다.

결국 그 불안정함은 균열을 맞는다.



기독교의 하나님

이신애를 최종적으로 절망하게 한 것은 당연히 그녀에게 닥쳐온 엄청난 때문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그것은 잠시간 그녀를 평화롭게 했던 기독교에서
비롯되었기도 하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을 선인과 악인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내가 기독교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바가 맞다면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은 '하나님을 받아들인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구분한다. 기독교의 천국에서 받아들이는 인간은 '죄를 범하지
않은 자'가 아니고 '죄를 회계한 자'다. 왜냐고? 어차피 기독교의 시각으로 모든
인간은 죄인이니까.

다시 말하면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밀양에 내려와 아이와 단 둘이 의지하며
살다가 그 아이를 유괴범에게 잔혹하게 잃은 이신애나, 이신애의 아이를 납치하여
돈을 빼앗고자 하고 아이를 살해하여 그녀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 학원 원장
이나 기독교의 하나님에게는 똑같은 죄인이며, 따라서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죄를
회계하고 하나님을 모시면'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길
잃은 어린 양인 것이다.

신의 논리로 이쯤은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자식의 유괴 살해범과 똑같은 '어린양'이 된 누군가에게 이것보다 더
잔혹한 논리는 없다. '나'라는 개인이 아무리 선하게 살아왔어도 죄 - 선량하게
살았다고 자부하는 누구에게는 뭔지 알 수도 없는 그 죄 - 를 회계하고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한 나는 유괴 살인범과 다를 바 없고, 설사 회계하고 하나님을 모시
더라도 유괴 살인범이 똑같은 절차를 거칠 경우 역시 다를 바 없다는 것은
신이 아닌 인간에게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무엇이 아닐까.

내가 내 삶에서 '하나님을 받아들일 기회'가 수도 없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어
지옥에 갈 리스크를 감수해가며 그러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일신교가 싫다.

세상 사람을 그들 자신의 Performance로 평가하지 않고, 그가 누구를 모시냐
를 가지고 평가하는 일신교의 오만함이 나는 싫다. 이 영화를 보며 다시금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Epilogue : 여배우 전도연

이 영화를 내게 권한 그 사람은 내게 이 영화에서의 전도연의 연기에 대해,
'이것은 깐느영화제 여우주연상감을 넘어 노벨 평화상 정도는 줘야 할 연기다.'
라고 농담섞인 극찬을 했다.

내가 그녀의 연기를 본 느낌은 다음과 같다.

"나는 밀양은 보는 내내 특별히 전도연이 연기를 잘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이신애라는 인물을 보았을 뿐 전도연이라는 연기자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신애의 어디에도 '전도연'이라는 연기자가 연기한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한 줄 요약

영화 밀양, 평점 : ★★★★☆

by IntiFadA | 2007/06/07 19:20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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